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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하는 속마음, 복종하는 태도 ..... 순종(존 비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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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10회 작성일 26-01-26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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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 순종하는 속마음, 복종하는 태도 순종 못할 순간에도 '복종하는 태도'를 잃지 말라 아마도 신자들 사이에 복종만큼 오해를 많이 불러일으키는 문제도 없을 것이다. 지금부터 석 장에 걸쳐 그런 난해한 이슈를 다룰 것이다. 보호 아래 거하는 삶을 가르치면서 나는 이런 질문을 수없이 들었다. * 어떤 상황에도 순종해야 하는가? * 지도자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 권위가 잘못 결정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 권위가 내게 잘못된 일을 명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 어디에 한계를 두어야 하는가? 권위에 자신 있게 복종하려면 반드시 답해야 하는 중요한 질문들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히 13:
17). 여기서 기자가 분명히 권하는 일은 두 가지다. 우리를 인도하는 사람들에게 순종하는 것과 복종하는 것이다. 이 둘은 서로 다른 명령이지만 이 둘을 혼동하는 사람이 많다. 우리는 순종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복종은 아닐 수도 있다. 공급이 사라지다 그러나 이 달콤한 시기는 1년쯤 계속되다 차츰 사라졌다. 처음에는 서서히 진행되었으나 급격하게 사라졌다. 목사 가정에 가까이 갈수록 흠이 많이 보였다. 신선함과 감격도 더는 흠을 가리지 못했다. 내가 목격한 일들을 머릿속에서 떨치기가 힘들었다. 곧 그런 장면이 나를 사로잡기 시작했다. 일을 진행하는 단계적 절차, 문제 처리 방식, 거기서 내리는 결정 등 수긍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 일반 회사에서 듣는 신랄한 비판과 다를 바 없는 말들이 난무했다. 어떤 직원이 거론되는 경우, 그가 해임이나 권고사직을 당하는 건 시간문제임을 알았다. 그들은 번번이 (내가 보기에) 유창한 말솜씨로 사람을 홀리는 사람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떠나야 했다. 새로 들어온 사람들 대부분은 관리직이나 다른 중요한 자리로 쉽게 옮겨 가는 듯했고, 담임목사는 경건한 사람들보다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더 즐기는 것 같았다. 담임목사는 그 사람들이 음담패설을 말할 때는 낄낄대고 웃으면서도, 신실한 성도들과 함께 있을 때는 마음이 딴 데 있는 듯 무심하게 행동했다. 담임목사의 그런 행동이 너무 당혹스러웠고, 내 안에서는 비판적인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그 부분에서만 겉과 속이 다른 것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전국에 잘 알려진 한 국제 사역이었다. 모든 사역을 계속 유지하려면 많은 인력과 재정이 필요했다. 직원만 해도 250명이 넘었고 모든 시설도 최첨단이었다. 기존 사역과 향후 사업 구상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는 데 도움을 얻으려고 컨설턴트들을 초빙했다. 그들을 접대하는 일이 내 임무여서 우리 목사가 그들과 회의하는 자리에 나도 늘 같이했다. 그때마다 '이것이 대기업인가, 사역인가?' 하는 의문이 절로 생겼다. 들으면 들을수록 '이건 기만이다. 이들이 정말 영혼을 생각하는 사람들인가? 아니면 그저 돈이나 벌려는 사람들인가? 우리 목사님은 왜 저런 사람들을 주위에 두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즈음 내 주위에는 나처럼 비판적인 파트너들이 늘 있었다. 어느 집에서 저녁을 먹던 일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 집주인과 나는 둘 다 담임목사 부부 직속 직원이었다. 담임목사의 사역에서 더는 받을 것이 없다는 말이 나왔다. 내가 한 말이 기억난다. "지난 여섯 달 동안 설교에서 아무것도 얻은 게 없어" 다들 맞장구쳤다. 유독 아내만 가만히 있었다. "더는 우리한테 공급해 주는 것이 없다"는 말이 연달아 나왔다. 그 목사 밑에서 일할 날도 다 끝났다고 입을 모았다. 우리 자신이 아주 영적인 듯이 느껴졌고, 하나님이 우리를 그분이 친히 예비하신 사역으로 곧 인도해 주시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지금 있는 곳에서 일하는 것이 곧 끝나고 머잖아 더 좋은 자리로 가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내가 문제였다 며칠 후 기도하는 중에 자비의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 집에서 이야기한 문제들을 떠오르게 하셨다. '공급이 없다'는 말이 그날 저녁에만 나온 말이 아니었는데도 유독 그 말이 확대되어 계속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예배 시간에 담임목사의 설교를 듣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공급이 없어 메마른 내 상태를 생각하고 있으니 성령께서 단호히 깨우쳐 주셨다. 나는 기가 막히고 믿을 수 없었다. 이것이 정말 하나님이 내게 하시는 말씀인가? 예전에 나는 그런 지적을 받을 때마다 잠시 주저하며 내가 들은 말이 정확한지 따져 보았다. 이런 의문이 생겼다. "하나님, 다른 사람이 아니라 저한테 하시는 말씀 맞습니까?" 성숙할수록 이런 의문은 점점 덜 생긴다. 내가 아는 것이 얼마나 적고 내가 얼마나 더 성장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큰 소리로 물었다. "왜 저한테 문제가 있다고 하시는 겁니까?" "너는 계속 공급이 없다는 타령을 하지만 이사야서에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신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사 1:19-
20)라는 말씀이 있다" 나도 잘 아는 말씀이었다. '그동안 아주 잘 순종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성령은 계속 말씀하셨다. "너는 이 사역에서 시키는 일은 다 순종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너희가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라 말하지 않았다. 나는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이라고 했다. 즐겨 순종한다는 것은 곧 네 태도다. 지금 네 태도는 불손하다!" 그때 성령께서 고등학교 시절에 있었던 일을 생각나게 하셨다. 거듭나기 전에 수요일마다 나는 <바레타>(Baretta)라는 탐정 드라마를 제일 재미있게 보았다. 그런데 바레타가 사건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결정적인 단서를 얻는 클라이맥스 순간만 되면 꼭 어머니가 들어와 방해를 했다. 목요일은 쓰레기를 버리는 날이었는데 쓰레기차는 새벽에 왔다. 그래서 전날인 수요일 밤이면 쓰레기를 내다 놓아야 했고, 그것은 내 일이었다. "존, 쓰레기 내놓았니?" 어머니는 꼭 드라마가 한창 재미있을 때만 들어와서 물으시는 것 같았다. 내 대답은 늘 같았다. "아직요" "지금 당장 일어나서 버리고 와" "예, 엄마" 나는 늘 이렇게 대답하며 일어났다. 누군가 내 행동을 봤다면 말 잘 듣는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속에서는 불만이 끓어올랐다. '도대체 엄마는 왜 항상 <바레타>가 한창 재미있을 때만 그 일을 시키시지? 10분만 있으면 끝나는데, 조금만 기다렸다 시키시면 안 되나?' 성령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순종했지만 즐겨 순종하지는 않았다. 어머니께 너는 바르게 행동하지 않았다. 이 교회에서 네게 공급이 없는 (내 나라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지 못하는) 이유는 네가 순종하긴 하지만 즐겨 하는 태도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의 것을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위험 지대로 가고 있었다. 목사에 대한 태도 때문에 그 지경에 이르렀음을 깨달았다. 히브리서 13:17절은 이렇게 끝난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눈이 번쩍 뜨였다. 즉시 회개했다. 다음 주일 같은 교회에 나가 같은 자리에 앉아 같은 목사에게 같은 시리즈 설교를 들었다. 그러나 그 아침에는 모든 것이 달랐다. 천국이 열렸다. 나는 하나님이 목사의 가르침을 통해 내게 주시는 계시에 크게 놀랐다. 하나님은 나를 그 목사의 권위 아래 두셨는데, 그 권위에 내가 보인 나쁜 태도 때문에 지난 여섯 달 동안 놓친 것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목사와 교회 운영 방식을 불평하며 마음으로 반항한 탓에 여섯 달 동안 내 상황이 잘 풀리지 않은 것이었다. 하나님이 권위를 위임하신 이들에게 복종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반항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세우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 위에 권위를 두시고, 그 권위를 통해 우리에게 잔칫상을 차려 주신다. 우리가 그 잔치를 마음껏 누리며 유익을 얻기를 바라신다. 순종이 권위에 반응하는 행동의 문제라면 복종은 권위에 대한 태도의 문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 대부분은 이 점을 놓친다. 하나님은 겉으로 보이는 행동과 마음에 숨은 태도를 함께 보신다. 다윗은 아들 에게 권좌를 물려주면서 당부했다. "내 아들 아 너는 네 아버지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의도를 아시나니 네가 만일 그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만일 네가 그를 버리면 그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대상 28:
9).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를 인도하는 사람들에게 순종할 뿐 아니라 복종하라고 가르친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롬 13:
1)는 바울의 말에도 순종과 기뻐하는 태도가 함께 들어 있다. 태도는 복종, 행동은 불순종 히브리서 말씀을 다른 번역으로 읽어 보자. "너희 지도자들에게 순종하고 그들의 권위에 복종하라"(13:17. NIV). 복종하는 태도 없이 행동으로만 순종하는 예는 이미 살펴보았다. 그러나 반대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복종하는 태도는 보이나 행동으로는 순종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책 3장에서 말한 두 아들 비유가 좋은 예다. 한 아들은 기쁜 태도로 "예, 아버지, 가서 아버지의 포도원에서 일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순종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그 아들의 태도가 훌륭하고 마음으로는 아버지의 요청을 합당하게 여겼지만 결국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하셨다. 오늘날 교회에도 이런 일이 많다. 우리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 웃으면서 자기 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예, 하겠습니다!" 한다. 그러고는 하지 않는다. 자기한테 중요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귀여운 거역이라 부르고 싶다. 하지만 속지 말라. 귀여운 거역도 노골적 거역 못지않게 독소적인 태도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둘 다 환영받지 못한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에게 예수님이 준엄하게 하신 말씀이 그것을 확증한다. 예수님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라" "내가 네 사업을 아노라" 하는 말로 각 교회를 문안하신다(계 2-3장). 교회들의 의도는 좋았다. 그런데 살아 있다고 자처했으나, 불순종한 행위 때문에 죽었다고 말씀하신 교회도 있었다. 예수님이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분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롬 2:
6). 좋은 취지만으로는 하나님의 심판을 견디지 못한다. 심판을 견디는 것은 온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순종함으로써 드러나는 참 믿음뿐이다. 어디에 선을 그어야 하는가 하나님의 명령을 다시 읽어 보자.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히 13:
17). 사람들은 정말 진지하게 이렇게 묻는다. "어디에 선을 그어야 합니까? 권위 있는 사람이 무슨 일을 시키든 무조건 순종하는 게 정말 하나님이 바라시는 겁니까? 나한테 죄를 범하게 하면 어떻게 합니까?" 성경은 권위에 무조건 복종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성경은 무조건 순종하라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복종은 태도의 문제고 순종은 명령을 수행하는 문제임을 잊지 말라. 유일하게 권위에 순종하지 말아야 하는 경우가 있다. 유일한 예외다. 바로 하나님이 말씀에 명시하신 것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일을 권위가 우리에게 시키는 경우다. 다시 말해 지도자들이 우리에게 죄를 지으라고 명하면 순종할 책임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그런 경우라도 겸손히 복종하는 태도를 잃지 말아야 한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잔인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많이 죽이고 이스라엘을 유린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느부갓네살을 그분의 종이라 부르셨다(렘 25:9. 27:5-
7). 사람에게 권위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다시 한번 확증하는 대목이다. 느부갓네살은 남아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바벨론에 포로로 잡아 왔다. 그중에 다니엘, 하나냐 (사드락) , 미사엘 (메삭) , 아사랴 (아벳느고) 가 있었다. 왕은 악기 소리가 들리면 금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라고 모든 백성에게 명령했다. 명령을 거역하면 풀무에 던져지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히브리 신하들은 풀무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했기에 그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주신 둘째 계명에 정면으로 어긋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인간의 명령에 불순종했다. 이 불순종이 느부갓네살 귀에 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다니엘의 세 친구에게 격노한 느부갓네살은 그들을 잡아와 심문했다. 이들의 대답을 들어 보라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6-
18). 이렇게 전혀 굽힘 없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면서도 왕에게 예우를 갖춰 말했다. 느부갓네살을 "왕"이라고 불렀다. "이 한심한 양반아, 우리는 절대 당신 말대로 못 해!" 하지 않았다. 그렇게 불경하게 말했다면 반역이다. 이처럼 권위의 명령에 불순종해야 할 때도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 베드로가 아내 된 이들에게 준 가르침에도 그 점이 나와 있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집사람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공경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벧전 3:1-
2).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할 뿐만 아니라(딛 2:
5) 복종하는 태도로 남편을 공경해야 한다. 베드로 역시 순종하는 행동과 복종하는 태도를 병행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거기에 정결함과 남편을 공경하는 생활방식도 더해야 한다. 베드로는 남편의 권위를 공경하는 태도를 지키라고 가르친다. 남편이 신자가 아니라도 마찬가지다. 물론 아내는 남편이 죄를 지으라고 시키는데도 순종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남편의 권위에 무조건 복종하는 태도로 그 권위를 공경하는 것이 아내의 소명이다. 신자인 아내가 전화를 받았는데 비신자인 남편이 상대와 통화하고 싶지 않아서 "나 없다고 해요"라고 말하는 경우가 좋은 예다. 그럴 때는 "여보, 거짓말은 안 할게요. 지금은 당신이 전화를 받을 수 없으니 나중에 전화하겠다고 말하거나 그냥 당신이 전화를 받고 싶지 않다고 솔직히 말할게요" 하고 대답하면 적절하겠다. 아내는 남편의 권위를 공경하는 태도를 지키면서도 거짓말하라는 요청에는 불순종한 것이다. 베드로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같이 너희는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 그의 딸이 된 것이니라 (벧전 3:3-
6). 사라는 아브라함을 "주"로 높이며 순종함으로써 그를 공경하는 마음을 나타냈다. "주"라는 명칭에는 복종하는 태도가 담겨 있다. 또한 그와 같은 순종은 사라가 두려움 때문에 굴복한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두려움은 가혹한 주인과 같다. 두려움은 이렇게 비아냥거린다. "나는 하나님만 믿어. 남편이나 다른 권위에 복종할 수는 없어. 나는 내가 지켜야 돼!" 권력에 굶주린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복종을 명하셨다는 것을 잊지 말라. 우리가 그분께 순종하면 그분의 보호하심이 우리 것이 된다. 명령을 곡해한 사례들 나는 무조건 복종하라는 명령을 무조건 순종하라는 의미로 잘못 적용한 여성들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비통해진다. 신자인 남편이 성적 흥분을 위해 아내에게 음란 비디오를 보게 했다는 해괴한 사례도 들었다. 그런데도 그 아내는 성경적으로 반대할 구실이 없다는 이유로 그대로 따랐다는 것이다. 남편이 자신을 위해 아내에게 정직하지 않은 일을 시킨 경우도 알고 있다. 물론 그 사람 아내도 그대로 따랐다. 남편이 아내에게 교회를 못 다니게 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 아내 역시 정말로 교회에 발길을 끊었다. 이런 요구에는 순종해서는 안 된다. 성경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좀 더 깊이 들어가 보자. 남편이 자녀나 아내를 때리는데도 아내가 그것을 덮어 주는 경우가 있다. 자녀가 남편한테 성폭행을 당하는데도 아내가 모른 척하는 경우가 있다. 남편의 그런 행위는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의 기반을 송두리째 짓밟는 일이다. 이런 상황에 있는 아내들이 반드시 알아보아야 할 일이 있다. 하나님은 아내들이 그런 경우에 속수무책으로 가만히 뒤로 물러나 있기를 절대로 원치 않으신다는 것이다. 남편이 생명을 위협하는 행동을 한다면 아이를 데리고 남편 곁에서 떠나야 한다. 남편이 철저히 회개한 것이 확실하기 전에는 돌아가지 말아야 한다. 힘센 전사인 다윗도 사울이 단창을 던지자 왕궁에서 떠나 광야로 가서 살았다. 그러면서도 사울의 권위를 공경하는 태도는 잃지 않았다. 사울을 피해 사울이 진정으로 회개하거나 하나님이 의롭게 심판하시기를 기다리는 중에도 다윗은 변함없이 사울의 권위에 복종했다. 더 높은 법에 순종한 사람들, 결단의 열매 성경에는 권위에 불순종한 다른 사례도 나온다. 바로는 히브리 산파에게 히브리 여자들이 사내아이를 낳으면 아이를 죽이라고 명했다. 그러나 성경은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출 1:
17)라고 한다. 하나님은 그들의 행동을 기뻐하셨다.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출 1:
21). 하나님은 죄지으라는 명령에 불순종한 산파들에게 상을 베푸셨다. 산헤드린 공회는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경고했으나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라고 답했다(행 4:18-
20). 이미 예수님이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
15) 하셨는데 어떻게 산헤드린의 말에 순종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었다. 산헤드린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명령에 어긋나는 일을 시켰고, 제자들은 공손히 거부했다. 그런 결단의 열매가 성경에 나온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행 4:
33). 하나님을 경외하는 제자들의 마음이 큰 복과 능력을 가져왔다. 그렇지만 동일한 산헤드린을 향한 바울의 반응에서 공경하고 복종하는 제자의 태도를 볼 수 있다. 그들 앞에 불려 나간 바울은 이런 말로 자기변호를 시작한다.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행 23:
1). 이 말을 들은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바울 곁에 선 사람들을 시켜 그 입을 치게 했다. 그러자 바울이 말했다.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행 23:
3). 곁에 선 사람들이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하고 말하자, 바울은 이렇게 대답한다.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행 23:4-
5). 아나니아가 권위 있는 인물임을 알고 나서는 바울은 자기 태도와 말을 뉘우쳤다. 제자들은 성경에 어긋나는 명령에는 순종하지 않았지만 복종하는 태도는 지켰다.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다니엘 시대에 왕을 제외한 다른 신이나 사람에게 기도하는 사람은 사자 굴에 던져 넣는다는 법령이 통과되었다. 다니엘을 시기하는 다른 총리들이 다니엘을 없애려고 생각해 낸 법이었다. 타락한 지도자들은 다리오 왕을 부추겨 법령이 왕의 도장을 찍게 했다. 다니엘은 그 법령에 따를 생각조차 없었다. 하나님께 순종하기로 정했기 때문이다. 시편 기자처럼 말이다.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시 55:
17). 다니엘 이야기를 읽어 보라.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 6:
10). 다니엘의 불순종을 왕에게 보고했고 왕은 다니엘을 사자 굴에 던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 불의 앞에서도 다니엘의 복종하는 태도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하나님은 굶주린 사자의 입을 막아 다니엘을 구원하셨다. 다니엘은 조금도 상하지 않고 심지어 잠까지 잘 수 있었다. 이 사실을 알고 나서 다리오 왕은 다니엘을 모함한 자들을 굶주린 사자들 앞에 던지게 했고 사자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을 잡아먹었다. 언제나 결과가 좋은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성도들을 구원하셨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경우만 있는 것은 아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지도자들에게 혹독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은 사람들 이야기가 나온다.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히 11:35-
38). 초대 교회의 스승 테르툴리아누스는 로마의 지도자들과 시민들에게 가하는 핍박이 오히려 기독교의 교세를 더 강하게 할 뿐임을 일깨워 주었다. "당신들이 우리를 잘라 낼수록 우리는 그만큼 수가 많아집니다. 그리스도인들의 피는 씨앗입니다" 어느 로마인은 핍박받는 신자들을 가리켜 이렇게 썼다. 그들에게 조국이란 나그네의 처소일 뿐이다. 그들은 육신을 입었으나 육신을 따라 살지 않는다. 그들은 지상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지만 천국 시민이다. 그들은 정해진 법률을 준수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삶은 법률을 능가한다. 그들을 미워하는 자들은 미워할 이유를 전혀 댈 수 없다. 신자들은 순종하고 복종했으나 그들의 공경과 복종의 행위는 단순한 순종을 넘어섰다. 베드로가 권고한 것처럼, 신자들이 부당한 지도자들을 향해 그런 행동으로 반응하자 지도자들은 당황했고 주님께 돌아오는 이들도 생겼다. 애매한 회색 지대는 없다 권위의 영역이 정부든, 가정이든, 교회든, 사회든 하나님은 복종하고 공경하는 태도를 지니라고 명령하신다. 권위가 성경에서 명백히 죄라고 하는 일을 시키지 않는 한 행동으로 순종해야 한다. '명백히'라는 말을 강조한다.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부인하라든지 사람을 죽이라든지 다른 신을 섬기라든지 하는 예수님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스르라는 명령에는 순종하지 않았다. 그런 지시는 이도 저도 아니게 애매한 회색 지대나 판단의 재량 문제가 아니었다. 교회 직원들에게 들은 회색 지대의 예들을 보자. "우리 목사님은 근무 시간 중에 사람들과 상담하거나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지 못하게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처사가 아니며, 사랑으로 행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 생각대로 밀고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권위 아래 있는 사람들의 주관적 판단이다. 자기 해석이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라고 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이 보수를 받는 것은 타이핑이나 서류 정리, 데이터 처리, 기타 이런저런 업무를 하기 때문이지 기도를 하기 때문은 아니다.
본질상 이들은 불복종 때문에 도둑질을 면할 수 없다. 정말 남을 위해 기도하고 싶거든, 목사의 허락을 받아 업무가 끝난 후 (즉 자기 시간에) 기도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야 한다. 어쩌면 목사는 그것조차 달가워하지 않을 수 있다. 어쩌면 목사는 교회로 전화해 도움을 청하는 교인들을 상담하는 훈련을 직원들이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목사의 그런 결정이 틀렸다면 하나님이 직접 책임을 물으실 것이다. 이 일은 그 목사의 권위 아래 있는 이들이 판단할 일이 결코 아니다. 이것은 수많은 예 가운데 하나일 뿐이지만 요지는 늘 같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명백히 어긋날 때만 권위에 불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동의할 수 없는 일을 시키면 어떻게 하나? 누가 보기에도 어리석은 일을 내게 시킨다면? 기도 중에 하나님이 내게 보여 주신 것과 반대인 일을 시키면 어떻게 하나?" 아직도 그런 의문이 있을 수 있다. 다음 장에서 그런 의문에서 성경이 내놓은 답을 제시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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